발췌-拔萃/종이

캘리포니아

한 가람 2007. 8. 26. 03:27

한강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은 내 얼굴을 거세게 때리며
무더운 6월의 밤공기를 날려 보냈다.
그 순간, 몇 달 동안 내내 어수선 거리며 맴돌던 여행지가 강한 번개처럼 꽝 하고 머리를 내리쳤다.
무엇보다 순식간에 그리고 명쾌하게 내린 결정이다.
파란 하늘과 야자수, 어디선가 들리는 레게 리듬, 해안 옆으로 쭉 뻗은 아름다운 길.
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리고 호흡이 빨라졌다.
아, 이것은 우연이고 필연이고 운명이고 순리다.
나는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숭고한 단어들을 떠올리며 당위성을 부여했다.
아침 7시부터 나를 탈진시켜준 회사에 고맙고
저녁을 굶게 해준 회의와 몸을 혹사시킨 운동량과
오늘 하루 참으로 불행하게 살게 해준 그 모든 것들에 감사했다.
그곳. 이제 가면 된다. 태양 밑에서 몸을 쪼이고 음악을 들으며 바다 옆을 달리면 된다.
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다.
나의 시한 폭탄이 터지기 전에...

2분 후 한남 오거리 신호등 앞에서
다시 앞뒤로 꽉 막힌 자동차들 사이에 끼어
멍하게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나는
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그곳의 이름을 크게 적었다.


글: 김영주
글출처: 캘리포니아
사진: William Hunder