본문 바로가기

발췌-拔萃/종이

오래된 정원



아버지는 앓고 누워 있던 어느날 내게 말했다.
'나는 노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.'라고.
달력의 처음 두어 달을 찢으면서 어떻게 까마득한 십일월을 예상할 수 있겠느냐고도 말했다.
젊은 날, 익명인 채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
서서히 죽어간 동지의 시체를 곁에 두고 자신도 죽어가면서.

말이나 생각과는 달리
죽음이라든가 감옥이라든가 전쟁이라든가 하는 것들은
그 속에서는 너무 실감이 나서 장난 같단다.

유리병이 탁자에서 떨어져 깨지듯이 너무나 확실한 사건들.
어어, 저 봐, 내가 뭐랬어, 정말 죽는 거잖아.
노년이란 다 빼먹었기 때문에 없어진 맛의 기억만이 남아 있는 곶감 같을 거야.
꼬챙이 끝의 나머지 한두개로 야금야금 과거를 되살리면서 연명해간다.


글: 황석영
사진: Barbara Peacock
출처: 오래된 정원

'발췌-拔萃 > 종이' 카테고리의 다른 글

사막  (0) 2007.07.03
어둠의 저편  (0) 2007.06.18
오래된 정원  (0) 2007.05.19
살아남은 자의 슬픔  (0) 2007.05.01
프린세스 마법의 주문  (0) 2007.04.26